나는 작가다. 할리퀸 식의 로맨스 소설을 쓰는 연애소설 작가다. 내 글은 독특하고 달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런 나의 글 스타일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여자들에게 잘 팔린다.
나는 이것에 매우 감사하고 있으며, 뻔하되 상투적이지 않은 글을 써 오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노력은 어느 정도 괜찮은 글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요즘엔 그냥 그런 젬병인 글만 써지고 있다.
연애 때문이다. 그래, 연애. 나에게도 남자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난 이 사람이 좋다.
무지 좋다. 우린 아직 손도 못 잡은, 이제 막 시작한, 100일을 조금 넘긴 커플이지만, 난 이 사람이 진지하게 좋다.
내가 그 동안 써내고 팔아먹었던 그 어떤 글의 연애보다도 더욱더 특별한 연애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거에 사람을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매우 다르다.
이렇게 심장이 뛸 수도 있구나. 이런 게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구나. 라는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한테는 아무런 억하심정이 없다. 정작 글을 못쓰게 된 지금까지도.
그래도 명색이 어디 가서 '저 연애소설 작가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인 내가, 정작 진짜로 하게 된 나의 연애 때문에,
내 자랑이었던 글을 못쓰게 되다니. 아 이런 젠장 할. 이런 법이 대체 어딨담.
뭐, 썩어도 준치고 밥은 자면서도 먹는다고, 그 동안 글을 쓰면서 익혔던 기술들을 이용해서 글을 써보려고도 했지만,
헛수고였다. 깜박이는 커서만이 보일 뿐이었다. 우선 나는 내 담당 기자님한테 당분간 글을 못쓰겠다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말했다. 우리 담당기자는 흔쾌히 허락했고,
지금 나는 침대에 대(大)자로 누워 곰곰이 이유를 생각하고 있다.
대체 왜 글이 안 써질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나의 연애 때문이다.
연애의 기쁨, 다시 말해 사랑의 기쁨에 푹 빠져 살기 때문에 진지한 글이 안 나오는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나에게 묻겠지.
사랑의 기쁨에 빠져 살면, 그 기쁨의 감정을 글로 옮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기쁨의 이야기를 쓰면 될 게 아니냐고.
미안하지만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느끼는 감정과 보이는 이야기는 다른 거니까.
어떤 감정을 어떤 이야기로 만드는 건..그래, 돌멩이를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과정과도 같다.
수많은 감정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리고 가장 적절한 한 가지만이 이야기로 남는다.
그런데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기쁨 그 한 가지니까.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애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연애를 그만두면 내 글은 더 쉽게 돌아올 것이다.
나의 연애 경험은 또 다시 가공되어 다른 이야기로 팔려나가겠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그랬듯이.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난 그가 좋으니까. 이게 웬 사춘기 여고생같이 투정을 부리는 거냐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다.
이 남자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엔딩을 보고 싶다.
그렇다면 집중의 문제인가? 내가 이 남자에게 충분히 집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한 에너지를 소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도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에너지 소모와 재충전의 관계인 것인가?
이게 가장 그럴듯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아니다.
나는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도, 이 남자를 만나는 것에 있어서도 충분히 마음을 주고 있고 집중하고 있다.
내 머리는 지금 생각하는 시리즈물의 캐릭터를 생각하고 있고, 내 심장은 그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24시간 힘차게 뛰고 있다.
그러니 이것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문제인 것이 틀림없다. 지금은 그저 그에게 빠져 있을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글이 개떡처럼 밖에 안 써지는 것이고. 이러다가 내가 글을 써야 할 시간이 되면 그때는 글이 써지는 것일 거다.
사실 요즘 들어 내 머리에도 가끔 그의 얼굴이 가득 찰 때가 있었거든.
그래 지금은 그를 위한 시간이고 내 글을 위한 시간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 통장 잔고가 조금 위태위태해진다거나,
아니면 내 책의 판매 수가 조금 부진해진다든가. 사람이 급하면 일단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없던 능력도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 이유를 알았다면 어떡해야 할까.
지금 당장 노트북 따위는 접어버리고 코트 하나 달랑 챙겨 입고 그의 아파트 앞에서 세레나데라도 불러야 할까.
그러기엔 그와 내 집은 너무 멀다. 천호동에서 파주까지는 너무 멀지 않은가. 아니,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몸이 못 움직인다.
나는 10대의 청소년이 아니니까 그런 억지를 쉽사리 부리지는 못한다. 어른의 슬픈 점이다.
그렇다면 편지를 쓰는 건 어떨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내 머리도 차지해버렸어요. 어쩌면 좋을까요.
가능하다면 지금의 이 순간 내가 팍하고 죽어버렸으면 좋을 정도에요. 이렇게? 아, 안될 말이다.
그는 내 몸에 있는 수술자국만 보고도 눈물을 글썽거리는 사람인걸. 심장수술을 할 때 정말로 걱정돼서 죽는다는 줄 알았다면서.
그러니까 이런 말은 그의 앞에선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해야 그에게 이 넘치는 내 마음의 기쁨을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인가.
아. 남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는 정말이지 쉬웠는데 이게 막상 내 일이 되니까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다.
그것도 모르는 이 남자는 이렇게 말했었지. 자기, 나 자기한테 연애편지를 받고 싶어요,
자기는 작가니까 아주 기똥차고 하나밖에 없는 말들도 잘 만들 수 있죠? 나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래. 일단은 편지부터 쓰자. 편지는 이야기와는 달라서 그냥 감정을 아무 고민 없이 옮겨놓아도 훌륭하게 쓸 수 있다.
그런데 편지에는 또 뭐라고 써야 하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둥글게 말고 잠시 생각하다 책장의 파일에서 편지지를 꺼내 놓고 한참을 보다가
망설이다가 펜을 잡고 폼만 잡다가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들어 그의 번호를 누르고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야, 너. 아니 아니, 오빠. 흥분한 채 전화해서 조금 미안한데요, 저 그쪽이 너무 좋아요. 진짜 완전히 좋거든요. 정말 쩔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오래오래 함께해요. 함께. 꼭. 부탁해요. 그리고 나선 전화를 맘대로 뚝 끊고 미친 듯이 혼자 웃어댔다.
정말 예의라고는 없는 전화였지만. 뭐 어떄? 라고 중얼거리면서.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던 엄마가 저년이 미쳤나.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어머니. 그렇지만, 저는 지금 무척이나 즐거운걸요. 그리고 오래간만에 글이 쓰고 싶어졌는걸요?
나는 엄마에게 들리지도 않는 대답을 하였다. 체한 게 쑥 하고 내려간 것 같았다.